[ET-ENT 갤러리] 2016 한국특별전 ‘훈데르트바서의 그린시티’ (3)

훈데르트바서 2016 한국특별전 ‘훈데르트바서의 그린시티’에 전시된 총 140여 점의 독창적이고 친환경적인 작품 중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인상적인 작품은 초상화이다. 초상화에는 훈데르트바서의 다른 영혼이 담겨 있는 듯하다.

◇ 130 나에게 흑인여인이 있었다면 그녀를 사랑하고 그렸을 것입니다

‘130 나에게 흑인여인이 있었다면 그녀를 사랑하고 그렸을 것입니다’(이하 ‘나에게’)는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흑인여인이 없다는 것을 뜻하면서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함한다. 흑인여인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사랑하지 않고 그렸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신의 그림인 ‘나에게’에서 자신이 이미지를 창출한 흑인여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는 동안 사랑이 점차 커졌을 것이고, 그림이 완성된 후에는 나르시시즘처럼 흑인여인을 사랑했을 수 있다. 흑인여인은 상대방이면서도 훈데르트바서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30 나에게 흑인여인이 있었다면 그녀를 사랑하고 그렸을 것입니다. 사진=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130 나에게 흑인여인이 있었다면 그녀를 사랑하고 그렸을 것입니다. 사진=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나에게’의 흑인여인은 갸름한 얼굴에 큰 눈, 큰 입술을 가졌다. 큰 눈과 큰 입술은 얼굴을 작게 보이도록 만든다. 흑인여인의 피부를 보면 초록의 푸르름이 느껴지기도 하고, 목재로 만든 형상이거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 같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작가는 흑인여인을 이국적으로 만들면서 밝은 표정을 줬기에,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마음의 문이 열릴 수도 있다. 가까이 관찰하면, 그녀의 뒤쪽의 파랑과 노랑의 영역은 그녀의 얼굴 속에도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나에게’의 흑인여인은 반투명으로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흑인여인이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배경 앞에 흑인여인을 상상한 모습이 오버랩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 122 로슬린 II 푸른 초상화

‘122 로슬린 II 푸른 초상화’(이하 ‘푸른 초상화’)는 빛의 위치로 인해 얼굴에 그늘이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얼굴을 분리해 분장 또는 화장을 한 모습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입술과 치아, 목, 그리고 머리카락을 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122 로슬린 II 푸른 초상화. 사진=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122 로슬린 II 푸른 초상화. 사진=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나에게’에서처럼 ‘푸른 초상화’도 배경의 위쪽은 파랑, 옷으로 표현된 아래쪽은 노랑을 유지한다. 훈데르트바서에게 파랑과 노랑은 어떤 색이기에 초상화에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사용됐는지 궁금해진다.

‘푸른 초상화’는 사람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보느냐, 부분에 집중해 보느냐, 아니면 초근접해 분리해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당황한 표정 같기도 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놀래서 피하려는 순간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훈데르트바서는 초상화의 표정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를 동시에 표현한다.

◇ 276 한스 누퍼, 두 가지 얼굴의 초상화

‘276 한스 누퍼, 두 가지 얼굴의 초상화’(이하 ‘두 가지 얼굴의’)는 훈데르트바서의 내면을 표현한 자화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을 싫어한 예술가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구조물을 만드는 건축가이다. 개념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적 설계자이면서도, 의식을 행동으로 옮기며 실천하는데 적극적인 행동가이다.

276 한스 누퍼, 두 가지 얼굴의 초상화. 사진=2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276 한스 누퍼, 두 가지 얼굴의 초상화. 사진=2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두 가지 얼굴의’는 훈데르트바서가 자신이 가진 양쪽 모두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가 진짜이고 하나가 가짜가 아닌, 둘은 모두 이어지는 하나이다. ‘두 가지 얼굴의’의 얼굴을 보면 좌우가 모두 다르면서도 연결 부분은 어긋나지 않았고, 좌우의 크기는 균형을 맞추고 있다.

훈데르트바서가 건축가와 환경 운동가로 덜 알려졌다면, 그가 그린 초상화는 더욱 주목받았을 수도 있다. 세계 최대 규모로 열리고 있는 ‘훈데르트바서의 그린시티’에서 우리나라 관람객들이 얼마나 다양한 감동을 찾을지 궁금해진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