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르노 세닉 E-테크'

[시승기]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르노 세닉 E-테크'

프랑스 르노는 전동화 전환에 적극적인 브랜드 중 하나다. 프랑스에 판매하는 승용차 22종 중 8개가 순수 전기차다. 상용차 부문은 더 적극적인데, 가솔린은 1종 밖에 없지만, 디젤은 7종, 전기차는 5종이다. 디젤 모델의 효용성이 높은 상용차 부문에서도 전동화가 상당히 많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잘 안 알려져 있다. 그동안 르노코리아가 한국에서 판매했던 초소형차 '트위지'와 소형차 '조에'의 판매가 신통치 않았던데다, 잘 팔릴 만한 차는 들여오지 않는 까닭이다. '트위지'는 파리 외곽의 시골 마을에서 달리면 어울리겠지만 서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큰 차를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조에'는 너무 작은 차였다.

그러던 르노가 이번엔 준중형 전기 SUV '세닉 E-테크 일렉트릭(이하 세닉)'을 선보였다. 사전 예약은 6월 말부터 시작했고, 보조금이 확정되면서 고객 인도가 시작된 건 8월 말부터다.

[시승기]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르노 세닉 E-테크'

세닉의 크기는 길이 4470㎜, 너비 1865㎜, 높이 1590㎜, 휠베이스 2785㎜다. 경쟁차의 경우, 현대 코나 일렉트릭은 각각 4355㎜, 1825㎜, 1575㎜, 2660㎜이고, 니로 EV는 4420㎜, 1825㎜, 1570㎜, 2720㎜다. 세닉이 두 경쟁차보다 모든 면에서 크다. 또 다른 경쟁차인 KGM 토레스 EVX는 차체 크기는 더 큰데(4715×1890×1735㎜), 휠베이스는 2680㎜로 코나 다음으로 짧다.

이들 경쟁차 중 디자인은 세닉이 가장 멋지다. 고급스러운 앞모습과 날렵한 옆모습, 세련된 뒷모습이 조화를 이뤄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코나는 단순한 앞모습이 아쉽고, 니로는 실내가 단조로워 보이며, 토레스 EVX는 차체 크기에 비해 실내가 좁은 게 단점이다.

두 개의 스크린을 연결한 오픈 R 디스플레이는 르노 자동차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SM6나 QM6의 다소 오래된 디자인에 익숙했던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특히 디스플레이가 아주 선명해 시인성도 좋다.

[시승기]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르노 세닉 E-테크'

뒷좌석에서는 음료수뿐 아니라 각종 스마트 기기(스마트폰, 태블릿 PC 등)를 놓을 수 있는 인지니어스(ingenious) 암레스트가 돋보인다. 긴 휠베이스 덕에 278㎜에 달하는 레그룸도 동급 최대 수준. 여기에 기본 545ℓ, 2열 폴딩 시 최대 1670ℓ까지 확장 가능한 동급 최대 트렁크 용량도 자랑거리다.

'솔라베이(Solarbay)® 파노라믹 선루프'도 동급 차종에는 없는 사양이다. 테슬라의 등장 이후 많은 전기차가 통유리로 천장을 구성하는데, 이런 구성은 여름철에 아주 난감한 상황을 만든다. 틴팅을 아무리 짙게 해도 뜨거운 열전달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 세닉은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는 솔라베이 선루프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세닉의 최고출력은 218마력으로, 코나(204마력), 니로 EV(204마력), 토레스 EVX(207마력)보다 높다. 또한 공차중량은 니로 EV(1705㎏), 코나(1720~1740㎏), 세닉(1855~1915㎏), 토레스 EVX(1960㎏)의 순이다. 이를 바탕으로 출력당 무게비를 계산하면, 니로는 8.36, 코나는 8.43~8.53, 토레스는 9.47, 세닉은 8.50~8.78이 된다. 이 숫자는 1마력이 감당하는 차체 무게를 나타내는 것으로, 숫자가 낮을수록 더 파워풀한 주행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시승기]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르노 세닉 E-테크'

이 숫자로만 보면 니로 EV가 가장 날렵하고, 토레스 EVX는 가장 둔한 차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니로 EV의 최대토크는 26.0㎏·m인데, 세닉은 30.6㎏·m로 훨씬 높다. 이 숫자의 차이는 실제 주행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승회가 열린 가평 일대의 와인딩 로드에서 세닉은 동급 내연기관차보다 훨씬 날렵하게 질주한다. 어느 오르막 커브길에서는 타이어에 스핀이 일어날 정도로 강력한 토크 감각을 뽐낸다. 운전 실력이 미숙한 이라면 차체 전체가 미끄러질 정도다. 토레스 EVX는 최대토크가 34.6㎏·m로 제일 높지만, 차체가 크고 무거운 탓에 비교 차종 중 가장 밋밋한 가속력을 보인다.

세닉의 주행 성능이 강력하면서도 안정적인 이유는 19~20인치 타이어를 적용한 덕분이기도 하다. 니로 EV는 17인치 타이어만 장착되고, 코나는 17, 19인치, 토레스는 18, 20인치인 데 비해 세닉은 가장 작은 휠이 19인치다. 205/55 R19 또는 235/45 R20 크기에 미쉐린 타이어를 적용한 세닉은 경쟁차 중 주행 성능이 가장 안정적이다. 시승 당일에는 미쉐린 크로스 클라이밋 2 SUV 타이어를 장착했는데, 프라이머시 투어를 끼웠더라면 훨씬 더 스포티한 주행을 보여줬을 것이다. 물론 겨울철 드라이빙에는 크로스 클라이밋이 더 낫다.

복합 기준 1회 충전 주행거리는 세닉이 460㎞, 토레스 EVX는 18인치 433㎞, 20인치 405㎞, 코나는 368㎞(19인치)~417㎞(17인치), 니로는 401㎞다. 세닉은 이 부문에서 압도적이다.

[시승기]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르노 세닉 E-테크'

충전 속도도 중요하다. 세닉은 130㎾ 급속 충전 시 약 34분 만에 20%에서 80%까지 배터리 충전이 가능하고, 토레스는 200㎾로 20%→80%가 37분 소요된다. 코나는 350㎾로 10%→80%가 39분, 니로는 100㎾로 10%→80%까지 45분 걸린다. 사례로 제시된 충전 출력이 모두 달라서 동일선상에서 비교는 어려우나, 니로를 제외하면 모두 엇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

세닉은 안전에도 만전을 기했다. 불이 났을 경우 '파이어맨 액세스(Fireman Access)'를 통해 배터리에 물을 직접 주입할 수 있어 만일의 화재 상황에서도 빠른 대응이 가능하다. 전기차에 불이 났을 때 얼마나 위험해지는가 하는 건 벤츠 EQE 화재 사건에서 모두가 똑똑히 목격한 바 있다. 세닉은 LG에너지솔루션의 파우치형 배터리를 사용해 중국 저가형 배터리를 장착한 일부 차종들과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또한 세닉은 에어백이 전개되는 사고 발생 시 고전압 배터리 전기 공급을 자동 차단하는 '파이로 스위치(Pyro Switch)' 기술도 적용되어 높은 화재 안전성을 갖추었다.

[시승기]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르노 세닉 E-테크'

세닉 E-Tech는 거주 지역별 전기차 구매 보조금에 따라 4067만~4716만원부터 구매할 수 있는데, 서울시 거주 소비자의 경우 4678만원부터다. 보조금을 제외한 경쟁차의 시작 가격은 KGM 토레스 EVX는 4602만원부터, 기아 니로 EV는 4855만원부터, 코나는 4152만원부터다. 국고 보조금은 코나가 623만원, 니로는 590만원, 세닉은 443만원, 토레스는 354~373만원이다. 토레스의 보조금이 가장 낮은 이유는 NCM 배터리를 쓰는 경쟁사와 달리 LFP 배터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르노 세닉의 경쟁력은 충분하다. 디자인과 실내 크기, 주행 성능, 1회 충전 주행거리에서 압도적이고, 이런 점이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세닉은 르노가 앞서 들여왔다가 실패한 전기차의 전철을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에는 999대만 판매한다고 하니, 구입을 원한다면 서두르는 게 좋겠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