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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오페라] ‘투란도트’(4) 대상관계이론, 로날드 페어베언! 리비도적 자아 vs. 반리비도적 자아

발행일 : 2019-08-12 16:09:55

CJ 토월극장에서 8월 8일부터 18일까지 공연 중인,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에서 투란도트 공주(소프라노 이윤정, 이다미 분)가 낸 문제를 풀지 못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되는가?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와 대본을 쓴 주세페 아다미, 레나토 시모니, 그리고 <투란도트>를 무대에 올리는 제작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 관객들이 아무런 거부감이나 불편함 없이 이런 모습을 단지 오페라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물론 필자와 같이 느꼈어도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관객도 있을 것이다.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 심리학자 로날드 페어베언(W. Ronald D. Fairbairn)의 ‘분열성 양태(split position)’ 모델을 적용하면 투란도트 공주가 칼라프 왕자(테너 이정환, 한윤석 분)를 거부하는 이유는 내면의 분리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오페라 속에 나오지는 않지만 투란도트는 성장 과정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적응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정당화, 합리화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투란도트의 삐뚤어진 행동은 어쩌면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되는가?
 
<투란도트>를 보면 투란도트가 낸 문제를 풀지 못하는 남자는 죽는다.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되는가? 그걸 관객이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랍다.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오페라이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문화예술 작품을 통해 받아들인 현실과 사실은 정서적인 면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내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말이 되지 않는 선택을 투란도트가 강력하게 반복하는 이유를, 페어베언의 모델을 통해 검증한다.
 
◇ 로날드 페어베언의 리비도적 자아/흥분시키는 대상, 반리비도적 자아/거부의 대상
 
페어베언은 삶의 목적은 본능의 충족이 아니라 관계라고 했다. 페어베언의 분열성 양태 모델의 핵심은 리비도적 자아/흥분시키는 대상, 반리비도적 자아/거부의 대상이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쾌락 추구였다면, 페어베언에게 리비도는 대상 추구라는, 용어 정의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분열성 양태 모델에서 완전한 고유의 자아는 본래 고유의 대상인 다른 사람과 완전하고 문제없는 관계를 리비도적 연결로 형성한다고 전제한다. 대상과의 완벽한 리비도적 연결이 침해받을 경우, 자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아와 대상을 각각 견딜 수 있는 부분과 견딜 수 없는 부분으로 나눈다.
 
자아는 스스로 견딜 수 있는 부분인 ‘리비도적 자아’와 견디기 힘든 부분인 ‘반리비도적 자아’로 분리되는데, 이는 각각 대상이 되는 타인의 부분인 ‘흥분시키는 대상’, ‘거부의 대상’과 연결된다.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즉, 강하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나의 부분인 ‘리비도적 자아’는 나를 애타고 감질나게 만드는 타인의 부분인 ‘흥분시키는 대상’과 연결된다. 의존적인 나에 대한 혐오와 거부 또한 같이 형성되는데 나의 부분인 ‘반리비도적 자아’가 돼 상대방을 ‘거부의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면 이때 사용되는 리비도는 쾌락 추구가 아닌 대상 추구이다.
 
나와 리비도적 자아, 반리비도적 자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고, 상대방과 흥분시키는 대상, 거부의 대상이 모두 다른 사람인지 같은 사람의 다른 면인지 궁금해질 수도 있다.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리비도적 자아와 반리비도적 자아는 모두 나이자, 내 안에 있는 나의 일부분이다. 흥분시키는 대상과 거부의 대상 역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 사람 내면에 있는 다른 면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원래의 자아와 대상이 나눠진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같은 결국 같은 사람의 다른 면인 것이다.
 
◇ 투란도트의 리비도적 자아, 반리비도적 자아
 
<투란도트>에서 투란도트는 자유를 얻고자 하면 포로로 만들고, 포로가 되려고 하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문장 자체에 집중하면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데, 투란도트의 청개구리 심보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리비도적 자아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투란도트는 자신이 낸 문제를 남자가 푸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냥 어려운 문제를 내고 즐기는 게 아니라, 못 맞추게 하기 위해 겁을 주고 협박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제 자체를 못 풀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문제를 푼 남자가 자신과 결혼하게 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기 위함일 수 있다. 문제를 푼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 것을 투란도트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문제 풀이에 남자들이 도전하는 것 자체를 막는 게 아니라, 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보면 투란도트는 도전하는 사람이 문제를 풀어줬으면 하는 마음과 풀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 분리돼 공존하는데, 풀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2019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사진.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오페라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투란도트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릴 적 힘든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투란도트>에서 투란도트의 어머니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무엇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투란도트는 반리비도적 자아를 워낙 강하게 드러내면서 자신과 관계성을 맺으려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세상에서 아예 없애버렸다. 그런 투란도트를 감싸 안은 칼라프의 마음과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는 투란도트의 리비도적 자아가 다시 중요하게 된 이유는, 칼라프가 투란도트에게 진정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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