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은 목멱산과 둔지산 사이에 있다
숭례문 성벽 따라 소월길을 오른다. 소월길에 노란 은행나무가 바람에 떨고 있다. 봄부터 여름 지나 늦가을까지 은행나무 잎은 목멱산 성곽길을 지키는 수호신 같았다. 싹이 나오고 잎이 무성해질 무렵 아무도 모르게 꽃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었다. 숭례문에서 해방촌 지나 하얏트 호텔이 있는 소월길은 은행나무가 있어 포근한 거리였다. 하지만 며칠 전 찬바람 속에 은행나무 잎은 무심히 떨어졌다. 도로에 떨어지고 길바닥에 맥없이 나뒹굴었다. 누구의 관심도 없이...

목멱산 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이태원 부군당이다. 우뚝 선 느티나무가 거센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이 이태원을 지키고 있다. 목멱산에서 한강으로 가는 길목에 가장 높은 언덕에 서서 주민의 안녕과 동네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태원은 언제부터 있었던 지명일까? 한양도성 성저십리에 동서남북으로 국가에서 관리하는 편의시설이 있었다. 흥인지문 밖 보제원, 돈의문 밖 홍제원, 그리고 숭례문 밖 이태원(梨泰院)이 있었다. 목멱산과 둔지산 사이 한강을 건너기 전 머물던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이었다.
이태원동은 이태원에서 유래한 동네 이름이다. 도성 밖 목멱산 아래 한강에 가깝게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도 아픔을 가장 많이 겪었던 동네다. 피 맺힌 왜란과 호란속에 피해는 온전히 백성들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 병영지로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나눠져 둔지산 기슭 둔지미 마을에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역사의 굴곡 속에서 둔지산의 시계는 멈춰 버렸다. 해방 후 미군기지가 된 후 해방촌과 미군기지 사이 높은 담벼락은 넘지 못할 금단의 땅이었다. 우리 땅인데 갈 수 없고 무심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높은 담벼락 너머 드넓은 미군기지와 반대로 이태원은 좁은 골목길로 산과 같다.
이태원에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이유 없이 잠들어 버렸다. 비바람에도, 거센 눈보라에도 버틸 수 있는 청춘들이 절기가 바뀌는 찰나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듯 아무 말 없이 스러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태원이 목멱산 기슭 비탈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높은 담벼락 너머 둔지산 넓은 광장을 활용할 수 있었다면... 아직도 담벼락 너머는 알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미지의 땅이다. 녹사평역에서 올라와 하늘을 보니 청명한 가을 하늘이다. 하얀 구름이 유유히 떠 있다.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필자 소개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유엔해비타트 한국위원회 사무차장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자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 저자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찾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