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유일한 향교가 양천 궁산에 있다
서울을 지킨 가장 전략적인 성곽이 한강 하류에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는 물줄기가 거세다. 호수와 같은 행호가 있던 행주산 맞은편 74m 높지 않은 산이 양천 궁산이다. 궁산 둘레 218m 성곽을 쌓으니 궁산성, 이름이 낯설다. 양천 궁산성은 한강을 끼고 행주산성과 임진강 파주 오두산성이 일직선상에 있다. 한강과 임진강 높지 않은 산에 3개 산성이 군사적 요충지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 전 궁산성에도 머물며 한강 어귀를 지킨 유서 깊은 성곽이다.
양천 궁산성 남쪽은 안양천이 흘러 한강에 모이고, 북쪽은 창릉천이 한강에 흘러 행주산성을 감싸는 한강의 전략적 요충지다. 그야말로 한강의 목구멍에 위치한 산성이다. 궁산 정상에 오르면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 터가 있어 개화산 너머 서해와 문수산 너머 강화도도 보이는 요새다. 한강 너머 안산과 인왕산 뒤로 삼각산도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과연 누가 오고 갔던가?

겸재 정선은 영조 때 양천 현령으로 65세에 5년간 행정과 함께 한강의 풍경을 그렸다. 양천의 주산이 궁산이요, 궁산 아래에 양천향교와 관아가 있었다. 궁산 중턱에 소악루 정자에 앉으면 목멱산에 아침 해 뜨는 풍경도 한눈에 보인다. 목멱산의 떠오르는 태양처럼 ‘목멱조돈(木覓朝暾)’의 그림을 바로 이곳에서 그렸다. 양천현 관아 뒤편 궁산 기슭 한강이 보이는 곳이 겸재 정선의 그림터다. 높지 않은 산에 작은 정자가 소악루다. 한강 아래 양천으로 해 뜨는 모습과 햇살이 끊임없이 비추니 양천(陽川)에 온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악루에 오르면 안산·인왕산·백악산 뒤 삼각산과 목멱산 옆 관악산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서울은 마치 산과 같다. 드넓은 한강 물줄기에 선유봉과 밤섬이 떠 있는 듯 신기할 따름이다. 해지면 궁산에서 강 건너 안산의 봉수대 불빛도 보인다. 300여 년 전 겸재 정선의 50년 지기 사천 이병연은 ‘안현석봉(鞍峴夕烽)’ 그림에 시를 담는다. 한점 별 같은 불꽃을 보고 양천 궁산에 머물렀다. 또한 밝은 달 뜨면 ‘소악후월(小岳候月)’이라 달 뜨는 풍경도 그렸으니 양천 궁산에서 밤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궁산은 왜 궁산이라고 불렀을까? 도성 밖 성저십리 한강을 넘어 강화도와 김포 가는 길목이 양천이다. 양천 허씨와 양천 최씨의 관향인 이곳은 향교도 오래전에 있었다. 도성 안 성균관에 명륜당과 대성전이 있었다면, 도성 밖 양천에 향교가 있었다. 1411년 태종은 양천에 향교를 세우고, 대성전에 공자와 그 제자 그리고 우리나라 성현 18분께 제를 모셨다. 인·의·예·지·신 유교의 오상과 오행을 실행하며 공자에게 매년 봄·가을 석존제를 지내니 양천향교 뒷산을 궁산(宮山)이라 하였다.

궁산에 성을 쌓고, 성황당에 나라의 안녕과 도시의 번영 그리고 시민의 역병도 이겨낼 수 있게 봄·가을 기원하였다. 궁산은 한강 하류의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궁산에 향교를 지어 양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궁산은 양천과 강서구의 경계다. 또한 양천향교는 서울에 유일하게 있는 향교다. 우리나라 234개 향교 중 한강에 가장 가깝게 있는 향교가 양천향교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의 터전이 이곳에 있다.
궁산 소악루에 오르면 한강 너머 목멱산이 보인다. 300여 년 전 겸재 정선이 수많은 그림을 이곳에서 그렸듯이, 한여름 소악루에 앉아 수박 한 덩이에 풍경 속 한 컷 찍으면 어떨까? 이름 모를 새소리와 흐르는 물소리가 친구가 될 것같다. 내일을 설계하는 리더에게 여유는 필요한 덕목이다. 한강 하류 양천 궁산은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
-‘우리동네 유래를 찾아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