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 CJ ENM 제작, 뮤지컬 <시라노>가 8월 10일부터 10월 13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 중이다. ‘콧대 높은 이 남자가 사랑하는 방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데, ‘콧대 높은’은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라노>에서 시라노(류정한, 최재웅, 이규형, 조형균 분), 록산(박지연, 나하나 분), 크리스티앙(송원근, 김용한 분)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내적 정서는 우리나라 제작진과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어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수 있다.
◇ 세상 어떤 사람 앞에서도 강자인 남자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약자
<시라노>는 귀족들 앞에서도, 자신을 상대하러 온 100명의 적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두려울 것이 없는 남자, 그렇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록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남자 시라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날 때 누가 저자세일까? 일반적인 경우 더 사랑하는 사람이 저자세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저자세를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내적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저자세를 취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시라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전달하기보다는, 외모가 훌륭한 크리스티앙에게 록산을 양보한다. 그냥 자신이 물러남으로써 양보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크리스티앙이 록산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와 이어준 시라노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라노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자신은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고착화하게 만들었다. <시라노>를 본 관객은 시라노라면 어떤 사람에게도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고 느낄 것인데, 정작 시라노 본인에게는 단 하나의 단점만 너무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시라노는 자신의 코처럼 자신의 삶도 우스꽝스럽다고 여긴다. 시라노는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분리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자신을 장점의 인간으로, 록산을 대할 때는 단점의 인간으로 내세운다. 시라노는 분리된 마음의 통합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을 경우 계속 아플 수 있다. 시라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기도 하고, 잘 모르기도 한 것이다.
재미있는 시라노는 인기도 많다. 그런데 콤플렉스 때문에 자신은 록산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뮤지컬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록산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외모가 훌륭한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록산과 정략결혼을 하고자 하는 허세와 자만심으로 가득한 부대 지휘관 드기슈(조현식 분) 때문에, 록산은 크리스티앙과의 결혼을 서두르며 괴로워한다. 다른 남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는 시라노의 심정은 어떨까? 그런 시라노를 보는 친구 르브레(최호중 분)와 라그노(육현욱 분)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라노>는 남자 관객뿐만 아니라 여자 관객도 울컥할 수 있는 뮤지컬이다. 다른 여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남자를 보던 때가 소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던 사람과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공연 내내 울컥하며 봤을 수도 있다.
오만, 거짓, 편견, 위선에 억눌려 말하지 못한 사랑, 말하지 못하는 사랑, 다른 사람의 이름을 통해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을 보면서 관객은,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랑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질 수 있다.
◇ 원소스 멀티유즈! 특히 우리나라 제작진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시라노>는 원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 작품이다. 원소스 멀티유즈는 하나의 콘텐츠로 다양한 장르에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1897년)에서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로 첫선을 보인 후, 미국(1950년)과 프랑스(1990년)에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2006년 영국에서 동명의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영국(2011년)에서 소설 <시라노>로 발매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극, 영화, 드라마, 뮤지컬로 관객들과 만났다. 2010년 연극 <시라노 드 베르쥬락>, 2010년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2013년 드라마 <연애조작단; 시라노>, 2015년과 2017년 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에 이어 이번에 뮤지컬로 재탄생됐다.
<시라노>가 원소스 멀티유즈로 특히 우리나라 제작진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작품의 핵심 정서가 우리와 통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의 지고지순한 진심과 순수성이 우리의 정서와 맞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 훅 들어왔다가 훅 나가는데 능수능란한 최재웅! 뮤지컬 넘버를 부를 때 굵은 목소리와 맑은 고음을 오가는 나하나!
<시라노>에서 시라노 역 최재웅은 훅 들어왔다가 훅 나가는데 능수능란한 연기를 보여줬는데, 시라노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진지하게 코믹한 연기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두려워하는 사람이 감정을 전달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는지 실감 나게 보여줬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표현력이 좋은 최재웅이 표현하지 못하는 시라노의 감정과 마음을 보여줬는데, 실제로도 시라노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최재웅의 연기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록산 역 나하나는 노래를 부를 때 굵은 목소리와 맑은 고음을 오가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들려줬는데, 감미롭고 아름다움을 서정적인 노래로 표현하는 나하나의 목소리는 최재웅의 목소리와 잘 어울린다.
<시라노>에서 칼싸움 장면을 보면 합을 맞추기 위해 정말 연습 많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자연스러운 동작의 합을 맞추기 위해 나하나가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무대에서 보여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