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된, 그랜드오페라단 창단 22주년 기념 OPERA <라 트라비아타 in Concert>(이하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윤정난 분)와 알프레도(테너 김동원 분)는 각자 자신의 마음을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상대방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투사(projection)’하기도 한다.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 심리학자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투사’와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의 개념을 적용하면, 두 사람이 왜 직접적인 마음의 표현을 하지 못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작품이 가진 한(恨)의 정서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대상관계이론, 멜라니 클라인의 투사적 동일시
멜라니 클라인은 투사가 투사적 동일시로 이어지는 것을 정립한 학자이다. 투사는 자기 내면에 있는 스스로 견디기 힘든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 고통과 괴로움을 줄이려는 것을 뜻한다.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외부 세계에 있는 대상으로 돌리려는 것인데, 주로 죄의식, 열등감, 공격성, 수치심 등 직면하기 어려운 면들이 투사된다.
내가 투사한 대상을 내 마음이 투사한 상태로 그냥 두지 않고 투사한 것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만드는 적극적인 투사가 이뤄질 수 있는데, 클라인은 이를 투사적 동일시라고 했다.

◇ 투사적 동일시의 대표적인 네 가지 종류 :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 힘 투사적 동일시, 성적 투사적 동일시, 환심사기 투사적 동일시
투사적 동일시는 수많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네 가지는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 힘 투사적 동일시, 성적 투사적 동일시, 환심사기 투사적 동일시이다.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는 무의식적 상태에서 “나는 너 없이는 살 수가 없어”라고 의존하는 마음을 상대에게 전가해 상대방이 나를 도와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반대로, 힘 투사적 동일시는 “너는 나 없이는 살 수가 없어”라는 힘의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전달해 상대방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힘 투사적 동일시는 상대방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며,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는 자기를 불완전한 존재로 본다.

성적 투사적 동일시는 나도 모르게 표현하는 유혹적인 몸짓과 움직임을 통해 상대방을 완벽하게 성적으로 각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적 투사적 동일시를 당한 상대방은 스스로의 자발적 선택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 아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투사적 동일시를 행한 사람을 유혹했다는 인정하기 힘든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환심사기 투사적 동일시는 자기의 헌신과 공로를 상대방이 인지하게 한다. 상대가 자기에게 빚진 마음으로 늘 미안해하게 만드는데, 많은 자기희생적 행동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환심사기 투사적 동일시를 행하는 경우가 많다.

◇ 알프레도에게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 환심사기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한 비올레타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사랑을 거절하면서도 꽃을 가져가라고 하고, 시들기 전에 돌려달라고 한다. 본인의 신분이 천박하기 때문에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면서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알프레도에게 투사한다.
만약 비올레타가 사랑에 대해 자존감이 높았으면 “나는 신분이 높지 않으니, 당신이 나를 선택한다면 사랑하겠어요.”라는 식으로 말하며 적극적인 의존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의존할 내면의 자신이 없기에, 비올레타는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한다.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알프레도와 살게 되면서, 비올레타는 모아놓은 돈을 다 써버리고 마차와 보석까지 팔게 된다. 경제적인 면을 모두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고, 그런 고충과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는데 비올레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형적으로 순종적인 여성상이라고 볼 수는 없는 비올레타는 알프레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저자세를 취하면서도 많은 자기희생적 행동을 인정받지 못한다. 비올레타는 의식적으로 적극적인 환심사기를 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환심사기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하는데, 투사적 동일시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恨)의 정서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

◇ 비올레타에게 처음에는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하다가 힘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하고, 힘 투사적 동일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자 폭력을 행사한 알프레도
<라 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에게 바로 고백하지 못하고 일 년 정도를 지켜본 후 고백을 한다.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이후부터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의 집에 가서 살게 되는데, 적극적으로 뭘 해달라고 하지 않으면서 비올레타가 모든 것을 다 해주게 만든다. 알프레도는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한 것이다.
알프레도가 의식적으로 인지하면서 그냥 의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비올레타는 알프레도를 위해 마차와 보석을 내다 판 것을 알고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하고 스스로 용납을 못 한다. 만약 용납을 했으면 무의식에 의한 의존적 투사적 동일시가 아니라, 의식하면서 한 의존이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복수를 다짐한 알프레도는(비올레타가 경제적으로 공격하지 않았기에 복수 자체가 해당되지 않지만) 파티 장소에서 비올레타를 만나 자신이 도박에서 이길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을 힘 투사적 동일시로 표현하는데, 비올레타가 힘 투사적 동일시에 걸리지 않자 의식적으로 힘, 폭력을 행사한다.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바리톤 한명원 분)은 아들에 대해 실망을 표현하고, 관객들 또한 알프레도의 행동에 실망했을 것이다. 비올레타를 사랑했던 사람이 저렇게 찌질한 행동을 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비올레타를 포용할 만한 자신감과 자존감이 있었으면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와 헤어진 후에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힘(폭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하기 전에 힘 투사적 동일시를 먼저 썼었다는 점을 파악하면, 알프레도의 질주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콤플렉스도 큰 비중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