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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칼럼] 10월의 하늘, 해마다 기적이 10년이나!

10월의 하늘을 오래 꿈꾸며

발행일 : 2019-10-11 10:03:24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10월의 하늘 준비위원)

올해로 ‘10월의 하늘’이 10회째를 맞았다. 10년째 10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과학강연 기부가 벌어져 왔다는 뜻이다. 나로서는 그것을 기적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따뜻한 마음으로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현실’ 말이다.

사실 그 출발은 소소했다. 2005년 무렵, 서산의 시립도서관에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과학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과학자를 보기 위해 읍내에서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온 학생부터 과학자를 처음 본다며 몸을 만지려는 장난꾸러기까지. 나는 그날 아이돌의 대우를 받았다. 그들이 내 머리카락을 뜯어가려고 애썼으니 말이다. 과학자를 처음 본다나!

그들에게 뭔가 해 줄 수 있는 과학자인 내 자신이 근사해 보였다. 그리고 서울만 벗어나도 과학자를 실제로 본 청소년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후 지역 도서관에서 과학강연을 하는 걸 재능기부인 줄도 모른 채 몇 해 동안 해왔다.

‘10월의 하늘’ 포스터. 사진=10월의 하늘 준비위원회 제공 <‘10월의 하늘’ 포스터. 사진=10월의 하늘 준비위원회 제공>

민감한 청소년 시기, 우연히 듣게 된 과학자의 강연, 무심코 읽게 된 과학책 한 권이 젊은이들에게 과학자의 꿈을 품게 만든다. 우주와 자연, 생명과 의식의 경이로움에 매혹된 채 말이다. 안타깝게도 작은 도시의 청소년들은 과학자를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다.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 과학과 친숙해지기란 쉽지 않다.

혼자만 하기 아쉬워, 2010년 9월 3일 ‘저와 함께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강연기부를 해주실 과학자 없으신가요’라고 트위터에 글을 남겼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불과 8시간 만에 연구원, 교수, 의사, 교사 등 100여 명이 기꺼이 강연 기부를 하겠다며 신청을 해주신 것이다. 허드렛일이라도 돕겠다는 분, 책을 후원하고 싶다는 분들도 수백 명에 달했다.

덕분에 첫 해 전국 29개 도서관에서 67명의 과학자들이 동시에 과학강연을 해주었고, 그 후로도 매년 40여 개 도서관에서 100여명의 과학자들 덕분에 과학강연회가 열렸다. ‘1년 중 364일은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정당히 청구하지만,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하루만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내 재능을 기꺼이 나누고 기부하자’는 취지를 많은 분들이 공감해 준 덕분이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TED강연에 비하면, ‘10월의 하늘’은 한없이 초라하다. 비싼 수강료를 내고 참석한 청중들에게 세계적인 학자들이 전하는 강연시리즈가 아니라, 그날 지방으로 내려가 기꺼이 과학강연을 기부하겠다고 자원해준 과학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교수나 연구원만이 아니라 대학원생, 과학교사, 과학기자 등 과학을 하는 누구라도 말이다.

잘 꾸며진 강연장이 아니라 100석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서관에서 벌어지며, 듣는 청중들도 대부분 그 지역 중고등학생들,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이다. 재능기부자들에게는 우리 행사가 'TEDx 운영자'처럼 이력서에 스펙으로 더해지지도 않는다.

재능기부로 진행되는 ‘10월의 하늘’은 누구든 참여해 강연할 수 있다. 운영도 ‘기억으로 가입되고 망각으로 탈퇴되는 느슨한 운영기부자들’만 있을 뿐이다. 책 후원 외엔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으며, 모든 활동들이 재능기부로만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의 하늘’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강연회의 감동을 잊지 못한 재능기부자들 덕분이다. 먼 거리를 버스타고 온 학생들의 눈망울을, 40분 강연을 위해 3일을 준비하고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먼 도시까지 와서 강연해준 과학자의 열정을, 한번도 과학강연을 준비해본 적 없는 도서관 사서의 친절한 배려를 잊지 못해 올해를 기다려온 분들 덕택이다.

‘10월의 하늘’ 캘리포스터. 사진=10월의 하늘 준비위원회 제공 <‘10월의 하늘’ 캘리포스터. 사진=10월의 하늘 준비위원회 제공>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행사이지만,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석 달 전부터 애써야 한다. 10주년을 맞은 올해는 각별히 이른 봄부터 준비위원회 멤버들이 10월의 하늘을 치르기 위해, 도서관을 섭외하고, 강연자를 모집했다. 청어람미디어 출판사의 도움으로 강연을 묶어 책으로 펴내고, 강연에 참석한 학생들은 강연을 듣고 정성스레 감사편지를 써 강연자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엽서를 마련했다.

홍보를 위해 포스터를 만들어주신 분들, 주제곡을 작사 작곡하고 동영상을 만들어주신 분들, 뒤풀이에서 강연기부자들에게 드릴 선물을 기꺼이 내놓는 분들. 이렇게 이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열 살이 된 ‘10월의 하늘’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지속가능성이다. 과연 이 행사를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을까? 트위터로 잠시 모였다가 강연회가 끝나면 바로 사라지는, 그래서 노하우가 축적되지 못하는 이 행사가 과연 10년 이상 버틸 수 있을까? 일시적인 기부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강연회가 되려면 어떻게 행사를 꾸려나가야 할까? 이 화두가 이 모임을 이끄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행사가 오랫동안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른 행사들처럼 법인화된 조직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상설 직원을 두고 일 년 내내 운영하는 방식도 고려해볼만 하다. 트위터를 통해서만 재능기부자를 모집하고 홍보하는 10월의 하늘의 개성도 이젠 포기해야 할까?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SNS뿐만 아니라 언론을 활용하고 광고를 하는 것도 방법이리라. 기업의 후원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수많은 조언을 뒤로 하고, 올해도 첫해처럼 돈과 조직 없이 소박하게 시작했다.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폭발적인 열정을 만들어낸다는 작은 믿음 하나로. 느슨한 조직이 갖는 유연하고 자유로움이 우리 모임에 참여하는 많은 분들을 즐겁게 하는 가장 큰 가치임을 깨달으며 말이다.

한국도서관협회가 도서관을 모집해 주고, 열정적인 재능기부자들이 모여 강연자와 도서관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전국 100여개 도서관에서 과학강연회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10월의 하늘’ 캘리포스터. 사진=10월의 하늘 준비위원회 제공 <‘10월의 하늘’ 캘리포스터. 사진=10월의 하늘 준비위원회 제공>

놀라운 기적은 모두를 감동시키는 한 순간이 필요하다. 뭔가를 10년째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슴 설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함께 해주고 선한 사람들이 도와준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현상’이 세상 속에 만들어진다.

소풍가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서 도착한 작은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눈망울들, 강연을 들은 학생들이 정성스레 써준 감사의 편지들, 도서관 사서께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시면서 건네준 마늘이나 밤 같은 지역특산물 선물까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감동이 우리를 10년째 참여하게 만든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진 재능을 기부하겠다는 마음은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거대한 사랑고백’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준비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뜨겁게 만나고, 그날의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소중한 기억. 재능 기부는 나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 대한 거대하면서도 따뜻한 사랑고백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듯, 재능도 세상을 향해 고백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매년 10월의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어왔다.

‘오늘의 과학자가 내일의 과학자를 만나다’라는 우리의 모토를 이제 현실에서 실현해 보고 싶다. 근사한 강연으로 그들에게 우주와 자연과 생명과 의식의 경이로움을 일깨워주고 싶다.

슬라이드 중심의 과학 강연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험하고 학생들이 실제로 참여하는 과학강연들로 말이다. 앞을 보지 못하거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는, 몸이 불편한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는 과학 강연으로 말이다. 연극이나 공연으로, 낭독회나 모의법정으로 새롭게 과학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10월의 하늘’에서 강연을 들었던 청소년들 중에서 한명이라도 과학자 혹은 공학자가 되어 세상을 좀 더 근사한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해 준다면, 우리는 항상 10월의 하늘을 준비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를 위해 애썼던 그 10년의 기록이 묻어있는 강연집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10월의 하늘을 위해 주옥같은 강연을 해준 분들의 강연을 소중히 담은 연애편지다. 민감한 사춘기 시절, 우연히 듣게 된 과학자의 강연으로 우주의 경이로움에 매혹된 청소년들이 과학책 독서를 통해 꾸준히 자연에 대한 탐구심을 높여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준비했다.

과학을 실험이나 논문으로만이 아니라, 책이나 방송을 넘어 ‘강연’ 형태로도 소통할 수 있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 그리고 그것이 진지한 독서를 통해 완성되길 기대한다. 아울러 과학강연과 과학 독서가 학창시절에만 듣는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의 한 형태로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가게 되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10월의 하늘을 준비하는 이유다. 이 책이 10월의 하늘이 주는 ‘강연의 즐거움’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조심스럽게 희망한다.

(옮김)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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