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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오페라] 서울시향 ‘캔디드’(3) 라포르를 형성하지 못하는 관계성을 자기대상의 개념을 통해 살펴보다

발행일 : 2018-10-21 07:29:46

서울시향 2018 번스타인 탄생 100주년 기념 오페레타 <캔디드(CANDIDE)>에서 캔디드(테너 조나단 존슨 분)와 쿠네곤데(소프라노 로렌 스누퍼 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라포르(rapport)를 형성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라포르는 주로 두 사람 사이의 상호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이다.
 
사랑하지만 라포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 심리학자로 자기심리학을 발전시킨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의 ‘자기대상(self object)’의 개념을 적용해 살펴보기로 하자.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 하인즈 코헛의 ‘자기대상’
 
심리학 이론 중 대상관계이론은 대상(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하인즈 코헛은 자기의 내부 세계보다 다른 사람을 포함한 환경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자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와 연결된 외적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들과의 지속적인 자기대상 경험 속에서 자기가 강화되고 유지된다고 봤다. 즉, ‘자기대상’은 ‘자기의 일부로 경험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내가 나를 바라봄으로써 나의 가치와 매력을 인지하고 발전시키기보다는, 나의 가치와 의미, 매력을 인정하는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줘야 자신의 존재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수동적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는데, 스스로 굉장히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기대상이 없을 경우 누구보다도 심한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다.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자기대상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거울 자기대상(mirroring self object), 힘없는 자기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힘이 있고 완벽하고 전능한 이미지와 융합하려고 찾는 이상화 자기대상(idealizing self object), 부모와 유사하거나 동일하다는 느끼길 원하는 쌍둥이 자기대상(twinship self object)이다.
 
◇ 올드 레이디는 쿠네곤데의 거울 자기대상이다
 
<캔디드>에서 올드 레이디(메조소프라노 빅토리아 리벤구드 분)는 부유하고 자유로우며 자신의 미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하는 쿠네곤데의 거울 자기대상이다.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쿠네곤데는 올드 레이디와의 대화와 이중창을 통해 두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했고 비슷한 기준으로 남자를 본다는 점을 공유한다. 쿠네곤데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올드 레이디와의 대화를 통해 명확하게 알게 되는데, 비슷한 경험을 했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올드 레이디는 쿠네곤데를 가장 잘 반영하는 거울 자기대상의 역할을 한다.
 
쿠네곤데는 캔디드와 대화를 하거나 이중창을 부를 때보다 올드 레이디와 함께 할 때 더욱 생동감이 넘치고 적극적이 되는데, 캔디드와 공유하는 정서보다 올드 레이디와 공유하는 정서가 많고 그것을 반영 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 판글로스 박사는 많은 등장인물의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캔디드>에서 판글로스 박사(바리톤 허프 러셀 분)는 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판글로스의 말을 진리라고 믿고 따르며, 판글로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들은 판글로스의 완벽하고 전능한 이미지에 본인들을 융합하려고 한다. 판글로스는 궤변을 가능성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그들이 판글로스를 이상화 자기대상으로 여기는 이유라는 점은 흥미롭다.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궤변을 합리화하는 사람을 왜 추종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은 본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판글로스는 가능성과 의지라는 개념으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캔디드와 쿠네곤데는 서로에게 거울 자기대상도 아니고, 이상화 자기대상도 아니다
 
캔디드와 쿠네곤데는 서로에게 호감이 있지만 강렬하게 밀착되거나 적극적으로 융합된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그들이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낙천적이기 때문에 적극성과 실천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그런데 자기대상의 개념을 적용하면 더욱 명확하게 그들이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캔디드와 쿠네곤데는 서로가 상대방의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관객은 캔디드를 통해 쿠네곤데를 보기도 힘들고, 쿠네곤데를 통해 캔디드를 보기도 힘들다. 두 사람은 거울 자기대상이라고 볼 수 없다.
 
쿠네곤데는 돈과 사랑, 보석을 원한다. 그렇지만 캔디드에게는 돈과 보석이 없다. 돈과 보석을 주지 못하는 캔디드는 쿠네곤데에게 이상적이고 전능한 이미지가 아니다. 캔디드는 쿠네곤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쿠네곤데와 함께 한다면 자시의 모든 게 완벽해진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상화 자기대상이 아니다.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캔디드’ 공연사진.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만약 캔디드와 쿠네곤데가 서로에게 거울 자기대상이고 둘 중 최소한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상화 자기대상이었다면, 관객은 캔디드 혹은 쿠네곤데에 더욱 감정이입해 관람했을 것이다.
 
작가가 자기대상이라는 개념을 별도로 알고 있지 않아도, 캐릭터와 관계성을 설정할 때 감각적으로 자기대상이 되도록 할 수 있는데 <캔디드>에서 가장 중요한 두 주인공 사이에서는 그런 관계성을 찾기 힘들다.
 
<캔디드>가 그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거나 여운이 진하게 남지 않는 이유는 관계성에서의 필연적인 밀착이 너무 느슨하기 때문일 수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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