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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국악] ‘흥보씨’ 고선웅과 국립창극단의 가치관을 의심하게 만드는 작품

발행일 : 2018-07-17 02:45:25

국립극장, 국립극단 주최, 국립창극단의 <흥보씨>가 7월 13일부터 2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고선웅 극본/가사/연출, 이자람 작창/작곡/음악감독으로 판소리 <흥보가>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다.
 
<흥보씨>는 판소리에 충실한 창극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지지 못한 자가 끝까지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명분과 당위성을 강요한, 고선웅과 국립창극단의 가치관을 의심하게 만드는 매우 안타까운 작품이다.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 판소리에 충실한 창극, 연극적 요소가 가미된 미니멀리즘 창극
 
판소리와 창극은 모두 오래된 장르로 생각되기 쉬운데, 판소리로부터 시작된 창극은 10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직 정립해 가는 과정에 있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오페라 스타일의 창극이 있고, 뮤지컬 스타일의 창극도 있는데, <흥보씨>는 판소리에 충실한 창극, 연극적 요소가 가미된 미니멀리즘 창극이라고 볼 수 있다. 판소리는 고수의 북만으로 창자(소리꾼)가 모든 것을 소화하는 극한의 예술이고, 창극의 경우 국악관현악의 연주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흥보씨>는 국악관현악의 연주로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북만으로 소리를 하는 시간도 많다는 점이 주목된다.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씨>는 판소리의 원형에 더욱 집중한 창극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연주의 다양성을 꾀하기보다는 한 명의 소리꾼이 담당하던 창(노래)과 아니리(말), 사설과 너름새(몸짓)를 여러 명의 소리꾼이 함께 하면서 연극적 재미를 높이고 있다.
 
공연에 한글 가사 자막이 제공된다는 점은 긍정적인데, 누가 부르는지도 표현됐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김준수(흥보 역)와 최호성(놀보 역), 김준수와 유태평양(제비 역)이 주고받는 창은 인상적인데, 김준수의 목소리에 서려있는 여성적인 감성이 남남 케미를 더욱 부드럽게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 고선웅과 국립창극단의 가치관을 의심하게 만드는 작품 속 설정
 
고선웅과 이자람, 그리고 국립창극단! 이름만 들어도 기대하게 만드는 조합이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한 <흥보씨>는 고선웅과 국립창극단의 가치관을 의심하게 만든다.
 
바보같이 착한 흥보와는 달리 놀보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캐릭터이다. 흥보가 결핍의 아이콘이 아니라 놀보가 애초부터 결핍의 아이콘이라는 점을 깔고 들어가기 때문에, 놀보의 성품이 사랑스럽지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놀보를 사랑했더라면 삐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만든다. 여기까지의 변화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그런데 판소리하는 외계인(조유아 분)이 등장하면서 <흥보씨>의 정서와 가치관은 크게 흔들린다. 외계인은 하나도 가지지 못한 흥보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얼핏 보면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이 착각할 수도 있지만, 가지지 못한 자가 끝까지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명분과 당위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흥보가 아닌 놀보에게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합리적이지,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지지 못한 자에게 ‘무소유의 깨우침’을 설파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상 주입이다.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가>에서 흥보는 많은 아이를 낳았지만 가장으로서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물로 그려진다. <흥보씨>에서 흥보는 부양할 능력도 없이 무책임하게 많은 자식을 낳는 대신에, 소박맞은 여인(이소연 분)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떠돌이 거지 떼를 자식으로 삼는다. 이 자체의 설정만으로는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무소유의 깨우침’이 들어가면서 문제는 확산된다. 떠돌이 거지 떼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지려고 하지 말고 무소유를 통해 깨우침을 얻어야 한다고 은근 슬쩍 강요하고 주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흥보씨’ 공연사진, 사진=국립극장 제공>

‘무소유의 깨우침’을 너무 나쁜 쪽으로 해석하지 않았냐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무소유의 깨우침’을 너무 가진 자의 시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닌가 먼저 검증할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놀보가 스스로 깨닫는 듯한 표현도 가진 자에 대한 미화로 여겨진다. 공연 마지막에 반복되는 “비워야하니 텅텅 그때서야 울리리 텅텅”이 깨달음의 교훈으로 느껴지지 않고 씁쓸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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