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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연극] ‘빨간시’ 어긋난 몸과 마음, 뒤틀린 시간과 공간

발행일 : 2018-04-25 14:18:49

광진문화재단, 극단고래 주최, 이해성 작/연출의 <빨간시(RED POEM)>가 4월 20일부터 5월 13일까지 나루아트센터 소공연장에서 공연 중이다. 2011년 초연 이해 꾸준히 재공연되고 있는 작품으로, 반복되는 폭력, 반복되는 아픔을 강력한 힘과 메시지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가 담고 있는 깊은 울림을 관객이 지나친 피로감 없이 느낄 수 있도록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는데, 한 번의 소극장 공연에 19명의 배우가 열연하는 모습은 작품의 감동을 배가한다.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 두 가지 이야기를 시적인 이미지로 연결, 공통된 아픔을 공유하게 만든다

<빨간시>는 제목처럼 한 편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연극 사이에 펼쳐지는 시와 영상, 그리고 정적의 여백까지 시적인 이미지로 연결되는데, 침묵은 단순히 대화가 없음이 아닌 말을 하지 않음 또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정서를 전달한다.

일제가 자행한 일본군 성노예 사건과 몇 년 전 한 꽃다운 여배우의 죽음으로 드러난 여배우들의 성상납 사건, 이 두 가지 아픈 사건 사이에서 공통된 지점을 바라보면서 공통된 아픔을 공유하게 만드는데, 관객석 곳곳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다.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일본군 성노예 사건 피해자의 손자이자, 성상납으로 자살한 여배우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유력 일간지 기자 동주는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항상 더러운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기분이 드는 그는 냄새나고 역겹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씻기를 반복한다.

할미와 여배우의 억울함과 분노가 모두 전이된 동주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의 사건과 내가 현장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 했던 사건 모두가 동주를 옥죄고 있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빨간시>는 할미와 손자의 죽음이 바뀌면서 어긋난 몸과 마음, 뒤틀린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는데, 동주는 물론 관객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염라대왕과 옥황상제는 그런 마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자극하는데, 완급 조절을 통해 정서를 집중하게 만드는 역할을 같이 하기도 한다.

◇ 탈은 뒷모습조차 감추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빨간시>에서 등장인물들은 탈을 거꾸로 쓰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뒷모습에 가면을 쓴 것은 뒷모습이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뒤돌아 있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일수도 있다고 추측된다.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뒤돌아 있는 모습을 감추고 싶은 것은 어디를 바라보고 어떤 모습을 보이든지 간에 죄책감과 미안함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할미의 기억과 여배우의 심정이 모두 동주에게 투사됐기 때문에, 돌아선다고 해서 동주가 느끼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름답고 두려운 빨간 꽃’이라는 표현과 함께 말이 두렵고 침묵이 두려워 결국 내가 두려워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점은 매우 안쓰럽게 여겨진다.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 진지함과 무거운 주제에 관객들이 지나치게 피로감을 느끼지 않게 하지 위한 배려

관객에 따라서는 충분히 몰입된 상태에서 잠깐 벗어나게 만드는 시간이 그다지 반갑지 않을 수도 있지만, <빨간시>는 진지함과 무거운 주제에 관객들이 지나치게 피로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완급을 조절하는 배려를 한다.

춤과 노래, 풍물 연주 등은 그 순간에서 볼 때는 완급을 조절하고 날카로움을 완충하는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어지는 감성과 정서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도약의 역할도 하고 있다.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빨간시’ 공연사진. 사진=극단고래 제공>

무대에서 할미 역의 강애심이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 그 장면을 스크린에 생중계하는 연출은 무척 돋보였는데, 무대 공연의 특성과 기록물의 느낌,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모두 생생하게 살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됐다.

<빨간시>는 소극장 연극인데, 한 공연에 19명의 배우가 무대에 등장해 열연을 펼친다. <빨간시>가 가진 메시지의 크기와 공연의 에너지를 고려하면, 중극장 이상의 무대에서도 역동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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