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컴퍼니가 만든 뮤지컬 ‘타이타닉’ 한국 초연이 11월 8일부터 내년 2월 11일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 중이다. 1912년 첫 항해에서 침몰한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다른 나라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픔을 전달하는 작품이다.
라이브 연주로 진행된 ‘타이타닉’의 뮤지컬 넘버는 오페라의 아리아를 떠올리게 했고, 클래식 분위기의 경건함 속 불안감은 극도의 위험 앞에서 직면하지 못하고 동결이나 회피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공연에 감정이입해 몰입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은 트라우마 또한 등장인물처럼 겪을 수 있다. 지속적으로 반복해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같은 트라우마를 계속 반복해 겪게 되는 것인데, ‘타이타닉’의 등장인물과 배우 모두를 위로해주는 큰 박수를 보낼 필요가 있다.
◇ 오페라 같은 뮤지컬, 현실감 강하게 불안감을 자아내는 무대 장치
‘타이타닉’은 라이브로 연주된다. 무대 2층의 오픈된 장소에서의 연주는 마치 타이타닉호에서의 연주하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서 뮤지컬의 노래인 뮤지컬 넘버는 오페라의 노래인 아리아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극작가 피터 스톤과 작곡가 모리 예스톤은 품격 높은 음악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불안감을 자아내는 무대 장치 또한 눈에 띈다. 객석까지 돌출된 독창적 무대 디자인의 핵심인 계단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관객석의 위치에 따라 더욱 실감 나게 보일 수 있다.
특별한 무대 전환이 없이 진행되면서도 긴장감과 불안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대 장치와 와이어신이라고 볼 수 있다. 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석탄을 넣는 장면에서 남자 배우의 팔뚝에 땀이 번들번들 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표현에 있어서 사실감을 높이는 디테일 또한 주목됐다.
◇ 견디기 힘든 극도의 공포에서 선택된 동결과 회피! 직면했다면 어땠을까? 눈앞의 위험을 직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왕시명 분)은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힌 후 스미스 선장(김용수 분)의 지시를 듣지 못하고 멈춰 서 있다. 넋이 나간 상태처럼 보이는데, 심리학적으로 보면 동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머독은 위험을 제대로 인식한 것이지만, 자기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동결 반응을 보인 것이다.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이상욱 분)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1등 항해사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비난할 수도 있지만, 경험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공포는 어떤 사람이라도 머독처럼 만들 수 있다.
반면에 배 안에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은 회피를 선택했다. 문제를 덮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데, 선장은 빙산이 있다는 전보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믿지 않았고, 배가 빙산에 부딪힌 후에도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무책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근거 없이 긍정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과 문제에 직면한다면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회피한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덕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타이타익호의 사람들이 동결도 회피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 직면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들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위험 상황에서 직면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정신의 훈련 못지않게 몸의 훈련 또한 필요하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정상적인 상태처럼 반응하는 것이 동결이나 회피를 누구나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방위 훈련, 지진 대피 훈련을 시행할 경우 뻔하고 형식적인 것 안 해봐도 다 안다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데, 뻔하고 형식적인 것도 직접 해 본 사람과 최근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타이타닉’은 인간의 오만함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대자연 앞에서 오만함, 경험하지 못한 시도에 대한 오만함, 기술력에 대한 오만함, 수차례 위험 경고에 대한 오만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많은 오만함 중 어떤 한 오만함이 겸손함으로 바뀌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 배우들이 받을 심리적 상처와 트라우마
‘타이타닉’을 보면 모든 배우들은 몰입하여 연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상 사고를 단지 뮤지컬 속 이야기라고만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몰입해 감정이입하면 관객으로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 또한 무척 힘들다. 특히 마지막의 와이어신에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아프고 힘들다.
한 번 혹은 여러 번 반복 관람하는 관객들에게도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는데, 매번 공연을 하는 배우들은 매번 트라우마를 반복 경험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연습 기간까지 치면 더 긴 시간이다.
이들은 어떻게 뮤지컬 ‘타이타닉’에서, 뮤지컬 ‘타이타닉’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스스로 자신이 무대에서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 극복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스스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재난 현장에서의 사람들처럼 이 작품의 배우들에게도 심리 상담이 필요할 수 있다. 무대장치 스태프를 비롯한 제작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커튼콜 때 관객의 열화와 같은 박수와 환호는 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어루만질 수도 있다.
트라우마는 사건성 트라우마와 인간관계 트라우마가 있다. 특정 상황에서 일회성으로 생긴 사건성 트라우마는 초기에 잘 대응하면, 반복적인 사람들의 관계성 속에서 생기는 인간관계 트라우마보다 상대적으로 잘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타이타닉’처럼 트라우마가 생기는 장면을 계속 연기한다는 것은, 같은 트라우마를 계속 반복하게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 트라우마보다 더 큰 지속성의 위험이 생길 수도 있다.
‘타이타닉’의 가장 큰 특징은 한 배우가 최대 다섯 개의 배역을 연기하는 ‘멀티-롤(multi-role)’ 뮤지컬이란 점인데, 특정 한두 명에 역할이 집중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트라우마 또한 특정 배역과 배우에 집중되지 않는다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타이타닉’에서 가장 인상 깊은 뮤지컬 넘버를 선택하라면, 남편을 혼자 둘 수 없어 구명보트에 타는 것을 거부한 아이다 스트라우스(임선애 분)에게 남편 이시도르 스트라우스(김봉환 분)이 부른 고백의 노래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